Ch5.Net

메인메뉴

산드라오 인터뷰 중 작성일 2022-06-19


봉준호 씨가 오스카 행사에 대해
"very local"이라고 한 발언은 이미 한참 전 일이긴 하나
이것에 관해 두 여성이 대화를 나누는 유튜브 동영상을 최근 봤다.
나에게 "베리 로컬"은 약간의 유머를 가미한 우문현답 정도였다면,
서구 사회속 마이너로 평생을 살았을 산드라 오 씨의 경우엔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받은 듯.
나는 이 발언이 인종 차별 주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단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평생을 한국 땅에서 살았지만
뼈속 깊이 공동체 일원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산드라 오 씨가 만성적으로 느꼈을
인종 차별까진 아니지만 언제나 변방, 마이너, 이방인처럼
늘 한국 사회를 겉돌았다.
내 학벌이 변변찮은 것도 머리가 나빠서가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이 사회에서 높은 신분 단계에 랭크되겠단 욕망이 없다 보니
동기 부여가 안 됐던 것도 매우 크다.

'세운상가 키드와 재즈'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 유럽고전음악을 듣는 취미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고 썼다.
주변에 이런 음악을 공유할 사람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당시 나의 '뇌'는 이 짓을 동성애자의 커밍아웃만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타부라는 인식이 있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의 고등학교 생활도 약간 그런 면이 있었고,
유럽고전음악은 소위 '범생이' 쪽에 속하는 영역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래서 이 취미를 밝히는 걸 "나는 나약하다"고 하는 것과
동급으로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소심한 겁쟁이와 다름없는 태도였긴 하지만
십대 나이를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
나이를 먹으며 음악 취향이 재즈, 땅고로 이동한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거 같은데
이로 인해 여전히 보통 한국인들과는 음악 얘기를 나눌 공감대가 거의 없다.

세기말 홍대 부근에서 '테크노'란 장르가 유행할 때
신현준이란 분이 '입 닥치고 춤이나 춰'란 책을 냈다.
밀롱가에서의 내 태도가 책 제목과 같다.
땅고 추기 위해 밀롱가를 가긴 하지만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다.
대화 내용이 공허하다보니 너무 지루해서.
가끔은 이런 수다가 필요할 때가 있긴 하나 1년에 한두 번이면 족한 것.
동시에 이런 점이 나의 성격 결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리에 어울리질 못하고 자연히 주변을 겉돌 수밖에 없다.
땅고 추는 사람들이 땅고 음악 얘길 거의 안 하는 게 놀랍다.
피아졸라에 관해서도 (땅고인들에게 기대했던 수준의) 상식이
너무 모자라 실망하고 거의 얘길 꺼내지 않는다.

'변방'이란 말은 쇠귀 신영복의 책에도 주요 개념 중 하나로 등장한다.
내가 이해한 대로 한 줄 요약하면
"역사 속 모든 변화의 시작은 늘 중앙이 아닌 변방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 변화를 꺼리는 수구적 속성이 있으므로
파격이 일어나는 지점은 변방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공감은 하지만 이 주장엔 현실을 외면한 측면도 있다.
변방에 속하는 만개 중 한두 개가 중앙에 충격을 줘
큰 변화의 흐름을 주도할 뿐이고
나머지 9,998~9,999는 변방에서 시작해 변방에서 끝나고 만다.
논어 첫 장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 하지 못하면
본인이 평범해서 잘나지 못한 건 모른 채
변방 구석에서 울분만 쌓다 갈 듯.

노름판에 "첫 끗발이 개 끗발"이란 말이 있다.
여태까지 내 인생엔 아예 끗발이란 게 없었다.
나름 몸공부를 20년 넘게 했건만 티끌 모아 태산은커녕
한주먹에 다 들어갈 정도가 고작이다.
아마도 이런 게 "베리 베리 베리 로컬"한
변방의 쌔고 쌘 삶일 것이다.
빛의 속도가 내가 초음속 비행기를 타고 있든
천천히 걷고 있든 무관하게 초속 30만 킬로미터이듯,
모든 인간의 인생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무관하게 허무할 뿐인 것 같다.
목록보기
분류 제목 작성일
사회 쓰레기 기사의 시작은 연합 뉴스부터 2022-08-10
음악 올리비아 뉴튼 존 별세 2022-08-09
기타 물 난리 사진을 공유하라는 페이스북 2022-08-09
기타 땅고판에서 들은 경로당이란 말 2022-08-08
사회 백신 4차 접종 2022-08-07
사회 윤석열 vs 낸시 펠로시 회담 최종 결렬 2022-08-06
컴퓨터 홍미 11 프로 똥덩어리 2022-08-03
기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만료일이 다가온다 2022-08-01
기타 좀비와 자각몽 2022-07-29
음악 우리들의 블루스? 2022-07-27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