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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커피와 땅고 작성일 2020-02-14
성북천이 흐르는 혜화문 밖.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 밤이다.
칼바람이 불지 않아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진작에 지났음에도 왠지 캐롤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날이었다.

저 멀리 어슴푸레 조명이 보였다.
작은 푸드 트럭이었다.
멀리선 뭘 파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 몸을 데울 따뜻한 국물을 원했던 터라 뭘 먹을 수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한 여성이 커피를 팔고 있었다.
주변에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몸을 휘감는듯한 냄새가 좋았다.
또 다른 이유로 나는 조금 놀랐다.
땅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트럭이지만 나름 간판도 있었다.
'다정한 망각’이라는 이름이었다.

커피는 네 가지 블렌드만 팔았다.
각각 가르델, 아스토르, 고비, 리께르도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가르델을 주문했다.
음악을 흥얼거리며 콩을 분쇄함과 동시에 물을 끓인다.
서버와 드리퍼에 필터를 끼우고 커피 가루를 올린다.
물 온도를 확인한 후 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물을 나눠 내려보낸다.
주전자를 들어 올린 팔엔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솜씨가 상당히 능숙했다.
커피를 마시며 나도 땅고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녀는 밝게 웃었다.

그로부터 매번 그 동네를 지날 때면,
아마도 전국 유일의 땅고가 흐르는 길거리 커피집을 자주 찾곤 했다.
커피 종류를 다 마셔 본 후 어째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가르델은 클래식, 아스토르는 누에보,
고비는 잊힌 천재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세 가지 콩의 비율을 달리 한 것이고,
리께르도는 자신이 처음 감명받았던 곡이라
개인 취향에 가장 맞는 블렌딩 이름으로 정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땅고 음악은 좋아했으나 춤을 춰본 적은 없다고 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팍팍한 생활을 하느라 그런 걸 배워 보리라는
여유 자체를 가질 수 없던 탓이라고 했다.
괜찮다면 내가 알려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공짜로 배울 순 없다고 했다.
나는 땅고를 알려주는 대신 커피를 곱배기로 제공하시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영업이 거의 끝나는 시간에 그녀를 찾아가
길거리에서 춤을 지도하였다.
그저 땅고를 듣기만 했던 것과 다르게
음악에 맞춰 춤 출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척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인적이 끊긴 고즈넉한 밤,
성북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조명 아래에서 함께 춤을 즐겼다.
밤 시간이라 음악을 크게 틀 순 없었지만 큰 장애는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음악에 맞춰 더불어 걷곤 했다.

어느 날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노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노점이 있던 건물 벽에 나에게 남긴 게 거의 틀림없는 짧은 메모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내용은 사적인 것이라 공개할 수 없다.
메모만으론 왜 그런 식으로 사라졌는지 모든 정황을 알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함께 보냈던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쌓아 올린 시간은
논리를 뛰어넘어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를 하는 듯했다.
사라진 그녀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상하게 원망스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노점이 사라진 텅 빈 자리를 한참 바라봤다.
그녀가 유난히 좋아했던 땅고 선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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