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5.Net

메인메뉴

그래비톨로지

Ch5의 의미

  • 땅(地), 중력, 작용/반작용, 인→지→천
  • 물(水), 이완, 마음의 이완 → 척추의 긴장
  • 불(火), 긴장, 마음의 긴장 → 척추의 이완
  • 바람(風), 흐름, 낙하와 회복(Fall & Recovery)
  • 비움(空), 무위자연

그래비톨로지

  • 내가 하고 있는 '운 + 동'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다.
    2016년에 '그래비톨로지'란 책을 쓴 뒤엔 구구절절 말 할 필요없이
    "그래비톨로지라고 스스로 명명한 몸공부 체계다"라고 답변하면 돼 조금 편해졌다.
    이것은 중력(=Gravity)와 본체론(=Ontology)를 합한 합성어다.
    처음엔 미국 사이비 종교인 '싸이언톨로지'를 패러디해 장난삼아 지은 명칭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하는 '운 + 동'을 가리키기에 꽤 적절한 용어임을 깨달은 뒤부터
    장난기를 걷어내고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넌 누구냐?"는 질문에도 적절한 답변을 못하고 그저 '길 가는 사람 = 도사'라고만 했었는데,
    그래비톨로지가 추구하는 길 가는 사람을 가리켜 '그래비스트'라 부르겠다고 책에 명시한 뒤엔
    단지 "나는 그래비스트입니다"라고 말하면 돼 간결해졌다.
    뭔지 모를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였던 것에 사소한 이름을 부여한 것만으로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래비톨로지가 바라는 궁극의 목표는 내가 서 있는 이곳, '지구의 중력'을 아는 것이다.
    '뇌'를 통한 논리와는 다른 '몸'을 통한 직관적 깨달음, 즉 '각성'을 추구한다.

    옛 말에 체(體)와 용(用)이란 개념이 있다.
    체(體)는 본체, 즉 몸을 가리키고, 용(用)은 몸 쓰임을 가리킨다.
    체(體)는 한마디로 몸 만들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몸 만들기와는 개념이 다르다.

    겉에 드러나는 근육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을 몸만들기라 하지 않는다.
    몸 속에 감추어진 한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한 몸 단련하기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단전(丹田)이라 하고
    서양에서는 그것을 파워하우스(Powerhouse)라고 했다.
    물론 각각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100% 일치한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식이 성립한다.

    단(丹) + 전(田) = Power + House

    파워하우스의 실체는 속근육(=inner muscle) 또는 심부안정근(=deep stability muscle)이다.
    속근육의 범위를 좁혀들어가면 몸 안 어느 부분에서 한 점으로 모아진다.
    이를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라 한다.

    속근육 기르는 수련을 체(體)라 하고,
    무게중심을 써서 바르게 움직이는 법 익히는 수련을 용(用)이라 한다면

    속근육과 무게중심을 동시에 아우르는 '핵심(核心)' = 속알

    이라 말할 수 있다.
    '속알'은 단전, 코어(Core), 파워하우스 등의 용어와 유사한 의미의 그래비톨로지 고유 개념이다.
    이 속알을 알고 깨달아 뇌는 '그것'만을 제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것'에 맡기는 것,
    이로써 몸 전체가 저절로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르고 참된 움직임임을 오랜 세월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속알을 아는 앎이 깊어질수록 몸은 무위(無爲)에 가까워진다.
    속알을 더 깊게 알기 위하여 주변 근육들(=파워하우스)을 단련시켜야 하고,
    유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모든 운동은 속알을 더 깊이 각성하기 위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것을 아는 앎은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는다.
    이로 인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진다.
    옛 글들이 단순히 좋은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공감하는 말씀(=logos)으로 화(化)하고
    그 말씀으로 인해 자율적인 도덕적 압박을 받는다.
    단순한 몸 움직임에서 출발하였으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바르고 선한 사람이 되는 길(道)을 제시할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한다

소통

  • 그래비톨로지 수련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몸만들기 = 속알을 매개로 마음과 몸 사이의 소통.

    '나'가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에 팔 또는 다리를 직접 제어하는 게 아니고
    '몸 나'와 먼저 통신을 주고받은 후 '몸 나'를 통해 팔 또는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나'가 직접 팔, 다리를 움직이면 팔 힘 또는 다리 힘이 나올 뿐이지만
    '나'가 '몸 나'를 통해 팔, 다리를 움직일 줄 알게 되면 비로소 '몸 힘'이 나온다.
    몸 힘은 '나'와 '몸 나'의 소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보물, 바른 움직임의 비결이다.

    이때의 '몸 나'는 특별한 무게중심으로 옛날엔 단전(丹田)이란 말로 불리웠다.
    또한 지구의 중심에 코어(the core, 核)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몸 나'를
    코어, 즉 속알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2) 명상적 걷기 = 중력(Gravity)을 매개로 몸과 지구 사이의 소통.

    '나'와 '몸 나'의 소통이 잘 되면 '나'는 '몸 나'를 매개로 지구와의 소통을 체험한다.
    지구와 '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무위자연하게 움직이는 법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된다.

    (3) 더불어춤 = 몸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 (언어를 초월한) 소통(=몸 대화).

    이것은 두 남녀가 더불어 함께 추는 춤이다.
    '나'와 '타인'이 몸 언어를 써서 서로 소통하는 공부를 위해 선택한 방편이다.

몸치 클리닉

  • 넓은 의미에서 몸치란 중력(Gravity)에 쓸데없이 저항하는 모든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중력에 저항한다는 건 기계로 치면 연료를 많이 소모하는데 효율이 안 좋은 것이다.
    몸치의 몸은 고비용 저효율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중력에 저항하는 짓을 안 할수록 힘이 적게 듦으로 그만큼 효율이 높아진다.
    그럼 저항을 안 하면 되지 않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 없다.
    일부러 저항하는 게 아니고 저항하고 있음 자체를 자각 못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진 몰랐는데 오늘 그것을 알았다면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에 대하여 상대적 몸치다.

    좁은 의미에서 몸치란 운동능력이 평균에 비해 절망적으로 떨어지는 사람, 즉 극단적 몸치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우선 심각한 수준으로 기초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또한 각종 스포츠, 춤 등을 배울 때 대부분 금방 따라하는 간단한 동작조차 쉽게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전에 나는 극단적 몸치의 문제가 오로지 운동 능력을 박복하게 타고난 탓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최근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에게 관찰을 허락(?)해 준 몇몇 몸치들은 몸 자체의 문제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마음에 어떤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란 심증이 강하게 들었다.
    무경험자로서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특별한 문제를 속에 품고 있다든지,
    심지어 그것을 남이 알까 두려워 꽁꽁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란 가설을 세운
    뒤 대하는 태도를 바꾸니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진전을 보았다.

    몸치일수록 운동을 잘 하고 싶고 춤을 잘 추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데 오히려 그게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실상은 간단한 것을 '욕망'이 매우 복잡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따라서 잘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포기만 하면 몸치가 갖고 있는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이 일거에 해소된다.
    몸을 통해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뿐인데 예상치 않게 마음의 병이 일부이긴 하지만 치유되었던 것이다.

    또 '요리는 손맛'이라는 말이 있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손맛이 없으면 따로 따로 논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것'이 재료 사이에 접착제처럼 스며들어 맛있는 요리를 탄생시킨다.
    손맛은 요리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고유의 감각 같은 것이라고 본다.
    스스로 리듬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리듬에 몸을 맡기면 기분 좋은 흐름이 순환한다.
    그럼 과정이 즐겁고 재밌어진다.
    만드는 이의 그 마음이 요리에 배어들어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손맛의 정체일 것으로 생각한다.
    과정을 즐길 줄 모른 채 까마득한 목표만을 바라보면 힘들고, 더디고, 불편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몸치 또한 스스로 리듬 만드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한 상태다.
    리듬을 모르니 흐름을 탈 수 없다.
    즉 대다수 몸치는 춤을 못 춘다!
    일반적으로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들지 못한다고 몸치라 하지 않고, 빨리 못 달린다고 몸치라 하지 않는다.
    몸치라면 예외 없는 특징 중 하나가 춤을 못 춘다는 것이다.

    첫째 원인은 앞서 말한 재료, 즉 몸만들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치들 중 99%는 설상가상 박치였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음악을 듣는 즉시 이것이 4/4박자인지 3/4박자인지를 구별 못하기 예사이고,
    첫 박이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을 모르는데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게 어찌 가능하겠는가.
    박치이면서 몸치인 사람에겐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몸치라서 춤을 못 추는 게 아니고
    박치라서 몸치처럼 보인다.

    정확한 통계를 내 본 바는 없지만 나는 이것에 상당한 확신을 갖고 있다.
    몸치라서가 아니라 박치이기 때문에 음악이 흘러나와도
    파도타기 하듯 그루브, 즉 흐름을 탈 줄 몰랐던 것이다.

더불어춤

  • 더불어춤은 커플 댄스다.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더불어춤은 커플 댄스가 아니기도 하다.

    더불어춤 수업을 통해 단지 '춤'만 잘 추게 됐다면 껍데기만을 얻은 것이다.
    바른 몸 움직임을 깨닫기 위한 방편으로 춤을 선택했을 뿐이다.
    중력과 몸 사이 상관관계, 속알(=무게중심 + 속근육), 척추펴기,
    등펴기, 중심 이동, 회전축 등 몇 가지 핵심 원리를 깨달아 몸 안에서
    모순 없이 저절로 구현되는 길을 스스로 발견하였을 때 비로소 참 된 '걷기'를 각성한다.
    결국 '걷기'를 잘 하면 모든 게 저절로 해결된다…는
    이 지극하고 평범한 메시지를 마음 깊이 납득하였다면 비로소 속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것들 중 하필 왜 춤을, 그 중에서도 더불어춤을 선택했는가?

    첫째, 명상적 걷기의 응용으로서 더불어춤은 매우 이상적이다.

    간단히 말해 혼자 걷기를 둘이 함께 걷는 것이 곧 더불어춤이다.
    걷기를 잘 못하면 대단히 어려운 춤이나
    걷기를 잘하면 그저 음악에 맞추어 걷는 것만으로 저절로 더불어춤이 된다.

    둘째, 음악에 맞추어 걷는다.

    그냥 걷기보다는 음악에 맞추어 걷는 것이 훨씬 덜 지루하다.
    모든 춤에는 음악이 필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잘 걷는 것만으로는 더불어춤을 즐기기에 부족하다.
    음악이 담고 있는 그 경이로움! 그것을 듣고 전율과 감동을 느끼는 체험이 있은 후에
    진정 리듬과 흐름에 맞추어 걷는 것, 즉 더불어춤이 가능해진다.

    셋째, 남녀가 홀드(hold)를 하고 함께 걷는다.

    더불어춤을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양과 음이 만나므로 양은 음의 섬세한 몸 힘을,
    음은 양의 강한 몸 힘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상적인 몸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상대를 통해 깨닫게 해 준다.

삽질(Dig)

  • 1980년대말 PC통신에 접속하던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이기현(Ken Lee)이 가상 공간에서 작업하였던 거의 모든 저작물을 모아 놓은 곳이다.

    모든 글들을 직접 쓰긴 했으나 글을 쓸 당시와 현재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들이 많다.
    어떤 글은 너무 편협하여 글쓴이를 민망하게 한다.
    삭제하지 않고 놔둔 이유는 그것을 거울삼아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반성의 뜻이 들어 있다.

    무엇이 되었든 본질이나 핵심은 항상 글 자체에 있지 않다.
    가급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을 움직여 직접 경험해 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상념들을 글로 남겨 놓고 그것을 다시 읽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보이지 않는 진실의 문에 다다르려고 애쓰는 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흔적들이다.